삶은 물음과 답의 연속이다. 내가 아는 어떤 부부는 결혼 이후 30 년간 부부 싸움을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끈질기게 지탱하여 왔다. 그 부부는 사사건건 다툰다. 감정 싸움
에서부터 시작하여 말싸움으로 그리고 심하면 물건을 때려부수고 급기야는 서로 밀치고 당기기
까지 한다.
사실 이러한 삶은 피곤하며 비생산적이고 비창조적이다. 삶을 창조적으로 꾸밀 수
있는 물음과 답은 넓고 깊어야 한다. 항상 같은 수준을 물매미 돌듯 빙글빙글 제자리 돌아가는
물음과 답은 단지 형식으로만 그치고 만다.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처한 이 어려움을 어떤 방법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을 설득하려면 우선 그의 장점을 몇 가지 분명히 늘어놓은 다음에 내 주장
을 부드럽게 이야기해야지."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문제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안 다음에 쉬
운 해결책부터 하나씩 실행하여 나가는 수밖에 없어."
"오늘 결혼식에는 갈 필요가 전혀 없어. 신랑과 신부는 물론이고, 청첩장을 보면 신
랑 부모도 평소 나와 그다지 가까운 사이가 아니니까."
우리는 매일 이처럼 거의 반복되는 무의미한 물음과 답의 홍수 속을 헤엄치며 살아
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물음과 답도 어느 순간엔가 생동감 넘치는 물음과 답으로 전환할
수 있
다.
"왜 삶은 물음과 답으로 채색되어 있는 것이냐?"
"나는 왜 사는 것인가?"
나는 감히 다음처럼 말하고 싶다. 즉 우리들이 '왜?'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왜?'의
의미를 음미하고 그 답을 찾고자 할 때 삶은 창조적일 수 있다는 것을. 젖먹이였던 과거의
내가 갑자기 오늘의 어른이 된 것은 아니다. 젖먹이는 오랜 세월을 거쳐 한없는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삶의 넓이와 깊이를 보태어 왔기에, 그토록 지루한 방랑의 길로부터 이제 누추하고
작으나마 삶을 여유 있게 관조할 수 있는 장소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너무나도 분명한 것은 삶을 통찰하는 자세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
적으로 보편적이며 필수적인 그러한 자세가 아니라 오로지 나의 체험에 의한 것이므로, 그것
은 나의 고유한 자세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것은 다시 시행착오를 거칠 여지가 있으며, 그러
기에 나의 삶은 또한 창조적일 수 있다.
누구나 다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제대로 의식하거나 체험
하지 못할 뿐이다. 일단 체험으로서의 삶을 소유하기 시작할 때 우리들 각자는 보다 풍요로운
삶을 가꾸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인가?"
이 물음은 우리들 삶의 한 순간에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 물음을
일생을 통하여 되묻고 답할 때 비로소 삶은 의미를 얻으며 창조적으로 된다.

- 인생을 최고로 살아가는 23인의 지혜 中(강영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