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3년 미국의 전문 컨설팅회사가 전세계의 6천 개 유명브랜드를 상대로 고객만족도 등 이미지 파워를 조사한 결과, 1위를 차지한 기업이 바로 일본의 소니SONY였다. 1994년 일본의 경제전문주간지 "다이아몬드"가 일본인들을 상대로 실시한 가장 존경한 기업인과 이미지가 좋은 기업에 대한 여론조사에서도 1991년 이래 모리다 아키오 소니회장(73)과 소니사가 4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이밖에 일본 내 1,110개사를 대항으로 한 "니케이신문" 여론조사에서21세기까지 비약적으로 성공할 기업으로 소니가 3년 연속 1위를 차지했고, 취업전문지 "리쿠르트"가 대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기업인기도 조사에서도 3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이처럼 소니는 일본 국내뿐 아니라, 전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최고의 이미지를 확보하고있다.

오늘날의 이같은 소니가 있기까지에는 모리다 아키오 회장의 기여가절대적이었다. 세일즈맨 출신답게 모리다 회장은 해외진출만이 소니와 일본의 살 길이라고 판단해 일본기업 중 가장 먼저 맹렬하게 다국적기업화를 추진했다. 그 결과, 오늘날 소니는 일본 이외 전세계 15개국에 40개의 생산거점과 8개의 연구개발거점을 확보하여 1993년 한국에만 362억 5천만 달러(29조 원)의 매출을 올리는 세계적 다국적기업이 됐다.

현재 소니의 모든 회의에서는 국제어인 영어만 사용하고 있는데,전체 12만 명의 종업원 중 55p가 외국인이고 전체매상의 75p를 해외시장에서 올리고 있을 정도로 소니의 국제화는 이미 오래전 완성됐다. 소니는 또 엔지니어를 중시하는 모리다 회장의 신념에 따라 신입회원 선발 때 출신대학을 묻지 않고 입사 후 자신의 희망대로 부서를 옮겨다닐 수 있는 자율배치제도를 실시하는 등 선진적 인사제도를 도입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소니는 가전부품에 관한 한 품질과 에프터서비스로 세계적인 명성을얻었다. 특히 오디오, 비디오 부문에서는 단연 세계 최정상이다. 1979년 생산을 시작한 워크 맨은 단일품목으로는 세계최초로 1992년 말 1억대 판매고를 돌파하는 세기적 금자탑을 세웠고 1968년부터 생산을시작한 소니 컬러 TV도 현재까지 6천만 대 이상 판매했다.

그러나 소니의 진짜 파워는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에 숨겨져있다. 모리다 회장은 한국, 중국, 대만 등 개도국의 맹추격으로 급속히 부가가치가 낮아지고 있는 단순 하드웨어 제조업에서 벗어나 고부가가치 첨단정보산업으로 진출하기 위해 1989년 11월 미국할리우드의 간판인 콜롬비아 영화사(현재 소니 픽처스 엔터테인먼트)를 48억 달러에 사들여 전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이로써 소니사는 '아라비아의 로렌스' '워터 프론트'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드라큐라' '울'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같은 세기적 흥행작을 비롯해 할리우드 최대의 필름도서관, 220개의 영화관, 그리고 2만 3천 벌의 TV프로를 소유하게 됐다.

모리다는 이 여세를 놀아 다국적 음반제작 및 판매회사인 소니뮤직을 만들었다. 마이클 잭슨,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머라이어 캐리, 신디 로퍼 등 전세계의 내노라하는 300여 명의 유명 가수를 전속으로 거느리고 있는 소니 뮤직은 창립 4년여 만인 1993년에 44억 8천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 전세계 음반시장의 2할 가까이를 장악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는 이밖에 세계최대 전자오락왕국인 닌텐도 타도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저가품 소니 게임기를 무기로 전자오락게임 시장에 뛰어드는 등 차세대 멀티미디어시대에 대비한 다중 포석에 총력을 쏟고 있다.

모리다 회장은 1993년 갑자기 졸도해 병석에 눕기 전, 자신의 후계자격인 사장직에 도쿄 예술대를 졸업한 뒤 독일에 유학 가서 바리톤가수로 활동하던 예술가 출신의 오가 노리오를 파격적으로 임명했다. 이에 대해 세간에서는 멀티미디어시대를 대비한 '과연 모리다다운' 일대 도박이라고 입을 모았다.

할리우드 진출과 오가 영입이라는 양대 승부수는 지금 와서 모리다가 당초 기대했던 것 이상의 성과를 올리고 있다. 한 예로, 1993년도 전미국 영화 흥행수입 중 20p가 프랜시스 코플라, 스티븐 스필버그 같은 최고의 감독을 총동원해 '드라큐라' '후크' '프리티 리그' 등의 고 흥행작을 양산한 소니사에게 돌아가 흥행수입 순위에서 소니는 2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또 1993년도 아카데미 수상 후보로 오른 84개 작품 중 소니사 작품이 자그마치 30개를 차지, 전세계7대 영화 메이저 중 단연 1위를 차지했다. 1994년 들어 다소 경영이 악화되기는 했으나 소니의 파워를 무시하는 이들은 없다.

할리우드 내에서의 소니 파워는 아카데미상조차 좌지우지할 정도로 비대해졌다. 1993년 아카데미 수상식에서 의상상은 '드라큐라'에서 상을 맡은 일본의 여성 디자이너인 이시오카 에이코에게 돌아갔다. 이 영화에서 중세의상을 훌륭하게 재현해냈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하지만 이 상은 처음부터 철저하게 소니의 각본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었다. 소니는 이 영화 제작 계약시 코플라 감독에게 이시오카를 고용할 것을 요구하는 등 치밀한 작업 끝에 마침내 이시오카와 일본에 아카데미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준 것이다. "이시오카가 아카데미상을 받는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우리는 그만한 투자를 했기 때문이다." 수상식 전날 오가 노리노 소니사장이 도진에게 한 말이다. 이미지 창출의 마술사 소니다운 오만함이었다.

- 세계를 움직이는 127대 파워(박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