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아이들 지능은 세살 때부터 비롯된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아이는 중학생 나이에, 심지어는 20대가 훨씬 넘은 나이에 머리가 트이는 경우도 있다. 절대로 조급해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보다는 아이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친구 중에 '나 후따 벤조'라는 친구가 한 명 있다. 그 때는 일제시대라 모든 교육은 일본어로 진행되고 있었다. 어느 나른한 늦은 봄으로 기억된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일본인 선생님의 눈치를 보며 살금살금 졸고 있을 때 갑자기 "센세이('선생'이라는 뜻의 일본어)!" 하는 큰소리가 들려왔다.

"센세이! 나 후따 벤조!"

모든 학생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일본어를 말할 줄은 물론 자기 이름조차 쓸 줄 모르는 아이였다.
일본인 선생님은 무슨 소리인지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히려 역정을 냈다 그러자 그 아이는 더 이상 말을 못하고 허리춤만 잡고 안절부절할 뿐이었다. 보다 못했는지 한 아이가 거들고 나섰다.

"선생님, 저애 급히 변소에 가고 싶은가 봐요."

그제서야 아이는 구세주를 만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아마도 아는 일본어는 없고 그렇다고 참을 수는 없으니까 온몸으로 그렇게 말했을 터였다. 그러니까 '나'는 손으로 가슴을 치면서 의사 전달을 할 수 있었지만 급하다는 말은 찾을 수가 없어 '후딱'을 연이어 발음하고, 그래도 '벤조'는 우리의 변소와 비슷하니까 갖다 둘러댄 것이 '나 후따 벤조'가 된 것이다. 그렇게 통역을 통해 아이는 위기를 모면했지만 그 아이는 평생을 '나 후따 벤조'라는 별명을 짊어지고 다녀야 했다. 즘에도 동창 사이에서 '나 후따 벤조'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렇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를 구박한 적이 없었다. 구박한다고 해서 아이의 머리가 좋아진다거나 성적이 향상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의 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실력으로는 상급 학교에 진학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빈둥거리는 아이를 보고 동네 사람들이 걱정하는 투로 그의 아버지에게 조언을 하곤 했다.
"어디, 기술이나 가르치지 그러십니까."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절대로 조급해 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머리가 트이겠지요."

결국 그의 아버지의 기다림은 보람이 있었다. 해방이 되자 각급 학교에서 대대적으로 보결생을 모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논 팔고 소도 팔아 그를 중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러나 고등학교만은 달랐다. 진학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어영부영 아버지를 따라 농사를 거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의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늦게 팰 옥수수인가 보지요."

동네 사람이 걱정하는 척하면 그의 아버지는 항상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한 대에 나고서도 일찍 패는 옥수수가 있고 늦게 패는 옥수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한술 더 떠서 늦게 팬 옥수수가 햇볕도 많이 받아 당분도 많고 더 쫄깃하다고까지 덧붙였다.

아버지의 믿음대로 그에게는 또 한 번의 기회가 왔다. 바로 6.25가 터진 것이다. 피난과 사망으로 한 차례 보결생 모집이 있었다. 그는 곧바로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까지도 공부를 못해 놀림을 받던 그가 고3이 되자 갑자기 실력이 향상되기 시작했다. 드디어 머리가 트인 것이다. 급기야 그는 지방 국립 대학에 장학생으로 진학,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지방 유지가 되었다.

이런 경우는 얼마든지 많다. '상대성 이론'으로 세계 물리학계를 발전시킨 아인슈타인은 바보 천치에 말더듬이, 천성적인 게으름뱅이였다. 오죽하면 선생님이 제발 학교를 그만 둬 달라고까지 했겠는가. 그 시절 그의 학적부에는 '아무런 가망이 없는 아이'라고 적혀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그가 1921년. '전기 소량 광전 효과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것도 뒤에서 사랑과 믿음으로 그를 가르친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 천재는 없다(류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