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공을 날아보겠다는 꿈을 20세기초 라이트형제의 동력비행 성공으로
실현하게된 인류는 그 영역을 우주에까지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인류가 우주공간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했던 진공상태의 우주에서
도 추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로켓을 만들게 되었다.
로켓은 화약의 발명국인 중국에서 11세기초에 최초로 발명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때는 로켓의 연료로서 마조각,수지,황,목탄,
질산칼륨같은 것을 혼합하여 참대통에 넣고 방향을 잡는 안정봉으로써
가는 참대를 붙인 것이었는데 그 당시는 무기로써 사용되었다.
여기에 달린 도화선에 불을 붙이면 연료가 급격히 타며 그 힘으로 날아갔
다.
중국에서는 이것을 화전이라 했다. 13세기에는 모두 병기로서 실용화되었
고 유럽에는 13세기 후반에 전해졌다.
그 후 19세기 초에 영국인 콘글레브(W. Conglev)가 로켓에 스핀(Spin)을
주어 궤도를 안정화시키는 방법을 고안하여 종래의 것에 비해 비행정도를
향상시켰기 때문에 영국군에 정식으로 로켓부대가 생겨 한때 크게 활약했
다.
그러나, 이렇게 로켓탄을 회전시키는 방법이 대포에도 도입되어 명중도를
향상시켰기 때문에 로켓이 아닌 대포로의 회귀현상을 나았다.
그 후 반세기 정도 지난 1891년에 프러시아의 발명가인 간스빈트
(H.Ganswint)가 로켓 우주선의 원리뜰 발표했지만, 학문적 체계를 정립한
사람은 같은 시대의 수학 교사로서 로켓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찌올코프스
키(Kostantin E.Tsiolkovsky) 이다. 그는 1898년에 로켓을 이용한 우주 공
간의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했고, 그 중 로켓의 비행법, 비행원리등에 관한
문제를 연구했다 자신이 직접 로켓을 제작하지는 않았지만, 현대의 로켓공
학의 원리적 기초는 이 사람에 의해 확립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중에서도 1883년 진공내에도 로켓은 배기 가스의 반작용에 의해 추진
된다는 것을 설명했다. 그 전까지만해도 로켓은 배기 가스가 공기를 밀기
때문에 추진력이 생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로켓의 획기적인
가능성을 증명해준 것이며, 로켓이 진공내에서도 작동한다는 것은 그가 죽
은 후 로켓이 우주공간에 발사됨으로써 증명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연구 노트에는 액체 추진제 로켓으로 추진되는 우주선
과 우주비행에 대한 여러 개념과 구상이 적혀있어 고체 연료를 사용하는
우주선은 우주 공간을 여행하는 데는 적당치 않아 로켓의 성능을 더욱 올
리려면 액체 추진제를 사용하여야만 된다는 것도 논하였다.
그 외에도 최근 우주추진에 사용되는 극저온 추진제의 이용, 추력 제어
방식, 인공위성이 지구 대기권 으로부터 탈출하고 다시재진입하는 이론, 다
단 로켓의 개념 등 많은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이론이 적혀 있다고 한다.
이 논문이 발표된 것은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에 사람을 태우고 하
늘을 처금으로 날개한 때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연구가 얼마나 진보적
이고 선구적이었나를 알 수 있다.
그의 업적이 높이 평가 받게 된 것은 그가 죽은지 10년 이상이나 지난
제 2차 세계대전이끝난 후였다.
그가 오랬동안 교직을 가졌던 마을에 기념비가 하나 서있다
거기에는 그가 언제나 하던 말인 "인류는 언제나 영원히 지구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1900년대 초에 미국의 고다드(R. Goddard)는 로켓 공학의 연구로 이미 이
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그의 연구 업적으로는 진공 탱크내에 서
추진제를 연소시켜 추력을 측정함으로써 로켓이 진공내에서토 작동함을 증
명한 것이 그 중 하나이다.
로켓의 연료로써 액체 산소와 액체 수소를 사용하는 것이 최적이라는 결
론도 얻었으며, 1914년에는 연료실, 분사통 및 추진제 공급장치 등에 관해
서 특허도 얻었다.
그 후, 고다드는 액체 추진 로켓을 직접 설계 제작하여 1926년 3월 16일
미국 메사추세츠주 어번시에서 발사에 성공하였다. 이 실험 비행에서 도달
고도 13m, 비행시간은 2.5초에 불과했지만 그 역사적 중요성에 있어서는
항공개발에 있어서 라이트 형제의 키티 호크(KITTY HAWK )비행에 비
유되는 우주 추진의 첫 역사적인 발사인 것이다.
사용한 추진제는 휘발유와 산화제로 쓰인 액체 산소였다.
지금 가장 흔히 사용되는 방법으로써 로켓의 비행 중 안정도를 높이기 위
하여 그 안에 자이로를 장치하는데, 그는 처음으로 이것을 로켓에 웅용한
사람이며 또한 로켓 엔진을 직립식으로만 장치하지 않고 기울어지게 함으
로써 로켓의 궤도를 수정하는 방법도 실험한 사람이다.
고다드의 액체 추진제 로켓의 실험발사 시험이후에도 세계 여러 곳에서
행해진 로켓의연구와 발사 실험들이 로켓개발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지만
현대 실용 로켓의 기초를 구축하고, 우주개발의 길을 열어준 것은 독일의
페에네뮨데 (Peenemunde) 우주센터와 폰브라운 연구팀이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1927년에 독일에서는 로켓에 대한 관심이 대단해서 아마추어 로켓 클럽인
VfR(Verein fur Raumschiffart e.v. )이 발족됐다.
그회원 중에는 오베르트(H. Oberth), 폰 브라운(W. von Braun)같은
큰 로켓 개발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과학자도 있었다.
오베르트는 독일 초기 로켓이론에 많은 공헌을 하였는데, 그 중 하나는
근대식 다단로켓의 설계와 공력 안정판의 설계라 할 수 있다.
오베르트가 설계한 2단사운딩(sounding)로켓의 구조다. 산화제 탱크와
연료 탱크는 모두가 2단 사운딩 (sounding)로켓의 구조로 여압이 된다.
산화제 탱크와 연료 탱크는 모두 압축가스로 여압이 된다.
제 1단의 추진제는 알콜과 물의 혼합물을 연료로하고 산화제로는
산소를 사용하며, 제 2단은 액체산소와 액체수소등 극저온(cryogenic)
추진제를 사용하는 획기적인 시도가 있었다.
이 B형 로켓은 실제 제작되지는 않았지만 로켓의 설계에 있어서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여러 선각자들에 의하여 로켓에 대한 개발, 연구가
있었지만 이것을 실용화한 극대식 로켓으로 만들어 인간이 달 세계를
정복하는데 원동력이된 사람은 폰 브라운(W von Braun)이다.
1920년대 후반부터 30년대에 걸쳐 오베르트의 영향을 받아 독일에서는
로켓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높았다. 바로 그때 독일 육군병기국에서도
제 2차대전의 전세를 만회하고자 장거리 공격의 위력을 가진 로켓의
연구 개발에 큰 관심을 가져 연구원을 물색하던 중 20살이란 젊은 나이의
청년 폰 브라운을 발견하게 된다.
브라운의 연구 성과도 알콜과 액체 산소, 알콜과 과산화수소 등 여러 가
지 액체 연료 로켓 실험을 한 결과 1934년에 도달고도 2000m의 A-2를 개
발하게 된다. 그러나, 애초에 제 2차세계대전이라는 시대적 배경 때문에 좀
더 강력하고 전투기에 의해 요격될 수 없는 초음속 미사일의 대량생산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 로켓의 엔진뿐만 아니라 자이로를 사용한 자동 조종 장치의 연구도
진전되어 드디어 1942년 10 월 3일에 고도 85km와 사정거리 190km를 비
행하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대형 로켓 A-4호가 시험발사에 성공 했다.
이름에 A자를 붙인 이유는 단순히 로켓이 날아간다는 것 외에 진로의 유
도라든가 연소의 조정을 하기위한 장치들이 내장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집합체(Aggregate)란 용어의 첫머리 글자를 딴 것이다.
이것은 1톤의 폭약을 담고 나는 것인데, 전 중량 13톤, 길이 14m, 추력 27
톤이며 약 5분 동안에 250km를 최고고도 80km까지 날 수 있는 것이었다.
독일은 이 로켓의 우수한 성능에 놀라고 기뻐하여 A-4를 다시 V-2호라
이름을 지었다. 이 V자는 보복병기(Vergeltungs waffe)의 머릿글자이다.
이 로켓은 실험발사에 성공한 2년후인 1944년 9월 8일에 영국의 런던 폭
격에 사용되었다.
2차 대전이 막을 내린후 V2개발에 주역할을 해온 폰브라운은 미국으로 갔
고 그의 동료 몇은 소련으로 연행당해 갔다.
이렇게 하여 미국과 소련은 새로운 로켓 개발에 들어갔으며 V-2로켓개발
에 종사하던 독일 과학자들은 그 후에도 미 ,소 양국에서 중거리 탄도탄,
대륙간 탄도탄 나아가서는 우주 로켓 개발에 활약하게 되었다.
보다 우수한 로켓의 연구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폰 브라운은 그 후에
V-2보다 훨씬 큰 레드 스톤(Red Stone)이란 단거리탄도탄을 만들었고
그것을 좀 더 크게하여 중거리 탄도탄인 쥬피터(JUPITER)를 개발하였다.
이무렵 소련은 1957년 10월 4일에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닉1호의
발사에 성공하여 우주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닉 1
호는 직경이 약58cm이며 길이 2m쯤 되는 안테나 4개가 바람에 나부끼어
뒤로 흐르는듯이 보인다.
이것을 궤도에 태운 로켓의 상단부도 인공위성으로 되어있지만, 이것은
같은해 12월 1일에 대기층에 재돌입하여 타버렸고 스푸트닉 1호도 다음해
1월 4일에 같은 과정으로 타 버렸다.
스푸트닉 2호는 무게가 508kg으로써 1957년 11월 3일에 라이카라는 개를
태워 우주비행을 했으며, 3호는 다음해 5월 15일에 발사되었는데 그 무게
는 1300kg이나 되는 것이었다.
소련의 첫 인공위성 발사에 커다란 충격과 자극을 받은 미국은 이때부터
폰브라운에게 그들의 원래 계획이던 위성 발사를 최단 시일내에 완수할 것
을 지시하였고, 이를 수행하는데에 필요한 전적인 권한을 부여하였다.
레드스톤(Red Stone) ICBM을 이용한 쥬피터(JUPITER-C)를 발사체로 드
디어 1958년 1훨 31일에 익스플로러(EXPLORER) 1호라고 이름지어진 인
공위성을 발사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뒤 폰 브라운이 지휘하는 마샬 우주 비행센터에서 개발한 새턴
(SATURN) V로켓은 아폴로(APollo) 11호를 달에 까지 올리는데 성공하였
다.
1969년에 드디어 인간은 오랜 터전인 지구를 떠나 달에 발을 디딘 것이다.
인류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중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로부터 미국은 각종 발사체를 개발해 왔는데 이들 중의 대부분은
도어(Thor), 쥬피터(Jupiter), 아틀라스(Atlas),타이탄(Titan)등의 탄도유도탄
을 개조하여 만든것이며, 다만 스카우트(Scout)와 새턴(Saturn)V와 그리고,
스페이스셔틀(Space Shuttle)은 처음부터 우주 운반체로 설계되 었다.
아폴로의 성공적인 달 착륙과 귀환으로 명예를 회복하고 우주경쟁에서
소련을 앞지르기 시작한 미국은 재사용이 가능한 우주 왕복선인 스페이스
셔틀의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우주발사체의 역사에 또하나의 이정표를 세웠
다.